의령군 가례면 백암정의 유래와 가치
문학박사 허만길
(전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
백암정은 조선 전기 예촌 허원보 창건
의령군 가례면에 있는 백암정(白巖亭)은 조선 전기 유학자이며 시인이며 교육자인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창건하여, ‘白巖’(백암)이라는 현판을 걸었던 정자이다.
의령군에 살고 있는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는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許黃玉)이다. 경남 고성에 살고 있던 고려 말의 충신 호은(湖隱) 허기(許麒)의 증손자의 한 사람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는 고성에서 혼인한 후 새살림을 의령현(현재 의령군) 가례(嘉禮. 현재 가례면)에서 꾸렸는데, 이것이 김해 허씨가 의령군에 살게 된 계기이다. 나는 그때는 혼인 시기가 빨랐다는 점과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여, 1480년 전후로 허원보가 가례로 이주하였으리라 추정했다.
김해 허씨 종중에는 의령군 가례면에 있는 정자 ‘백암정’(白巖亭)은 허원보가 처음 지어, ‘백암’(白巖)이라고 현판을 걸었다고 전해 오는데, 이것은 여러 문헌에 비추어 틀림없다.
첫째, 허원보의 묘갈명(묘비문)은 처음에는 그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이 써서 묘비가 허원보의 무덤 앞에 세워졌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묘비에 금이 가고 글자가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조선 후기에 의금부 도사 척암(拓菴) 김도화(金都和. 1825-1912년)가 다시 묘갈명을 써서 묘비를 세웠는데, 현재 의령군 의령읍 무동(무전) 허원보의 묘역에 있다. 허원보의 재실(齋室. 제사 지내는 집) ‘고망재’(高望齎)와도 가깝다. 김도화가 쓴 묘비문은 ‘김해 허씨 세보 권1’ 비명(碑銘) 모음(55-56쪽. 1936년 발행)에도 실려 있다. 이 책에 김도화가 ‘생원 예촌공 비명’(生員禮村公碑銘)이라는 제목으로 쓴 허원보의 묘갈명에는 가승(家乘. 직계 조상의 일을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원래 허원보의 묘갈명은 퇴도(退陶. 이황의 호의 하나) 이황(李滉)이 썼지만, 세월이 변하면서 묘비가 갈라져(碣泐) 글이 전하지 않는 까닭으로 자신이 다시 쓰게 된 배경을 말하고서, 허원보는 20살에 사마시(생원시 및 진사시. *김해 허씨 세보에는 26살에 사마시 합격이라 함)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가례’(嘉禮)의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작은 집을 지어놓고 ‘白巖’(백암)이라 현판을 걸고, 낚시질로 스스로 즐기고, 시를 읊어 풍류로 삼으면서, 세상의 명예와 이익과 어수선함과 화려함을 멀리했다.”(嘗酷愛嘉禮山水規置小屋而扁之曰白巖漁釣爲自娛嘯詠爲風流世之聲利紛華皆窅如也)라고 했다. 정자 백암(白巖)을 허원보가 처음 짓고 현판을 걸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도화가 가승을 확인하여 묘비문을 썼으므로 내용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김해 허씨 세보 권1’(3-4쪽. 1936년 발행)의 ‘허원보’(許元輔) 항목에 허원보는 “자는 몽득(夢得), 호는 예촌(禮村)이며, 성품이 온후하고 효와 우애에 힘썼다. 26살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거하였으며, 가례(嘉禮)의 백암(白巖. 흰바위)과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했다.”(字夢得 號禮村 景泰乙亥生 性本純厚躬行孝友 二十六中司馬 自固城移居宜寧 愛嘉禮白巖山水 規置一亭曰白巖)고 되어 있다. 백암정의 유래는 묘비에 실린 내용과 같다.
현재 ‘백암정’으로 불리는 정자는 창건 당시에는 ‘백암’(白巖)이라 불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건 시기는 허원보가 가례로 옮겨 살면서 바로 지었다면 1480년경으로서 2014년 현재로 보아 530여 년 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원보는 52살 되던 1507년에 별세하였는데, 2014년 현재로 보아 507년 전이다.
백암정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
백암정은 오백 수십 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세월의 흐름이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건물이 낡거나 부서질 적마다 끊임없이 새로 짓거나 고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 왔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적의 가치를 지닌다. 백암정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치인과 학자들이 정치와 학문을 토론하고 시와 풍류를 즐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도 크게 지니고 있다.
허원보의 묘비문에는 이 백암정에서 그 시대에 유명 정치인이며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좌랑(佐郞. *좌랑은 벼슬이름이며, ‘김해 허씨 세보’에는 벼슬이름을 우랑佑郞이라 하였음.) 김영(金瑛)과 함께 시를 읊었다며 시구 2행 “白石留佳客 靑山易夕陽”을 소개하고서 이는 족히 공(公. 허원보)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해 허씨 세보’ 권1(1936)의 허원보 항목에서도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우랑(佑郞) 김영(金瑛)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고 하면서, “移床坐坡面 冷氣透衣裳”(평상을 옮겨 앉아 얼굴을 비비니, 옷 속에 찬 기운 파고드는구나.)로 시작하는 한시(漢詩)가 제목 없이 실려 있는데, 백암정 바로 근처의 백석(白石. 흰바위. ‘백암’을 가리킴)에 평상을 옮겨놓고 석양을 배경으로 물가에 모여 술과 붕어회를 즐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시의 형식은 오언율시(五言律詩. 5글자씩 8행)이다. 묘비문에 소개한 시구 2행이 ‘김해 허씨 세보’에서 3행, 4행에 배치되어 있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4년 12월 26일
- Copyrights ⓒ의령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