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을 의령으로 삼고 있는 의령여씨대종회(회장 여규태)는 지난 11월 17일 오전 11시 장등산 시조공 묘역에서 종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조 의령군(宜寧君) 여공(余公) 기적비(紀蹟碑) 제막식과 시조공 기축년 추향봉제를 가졌다.
‘백제왕손 의령군 여공 기적비’는 “~여씨로 성을 삼은 가문은 우리 역사가 열린 새벽인 단군조선시대에 을여(乙余), 을루(乙婁) 두 분의 임금이 계셨고, 예(濊)나라에는 여수기군장(余守己君長)의 기록이 있다. 백제시조 온조대왕은 그 뿌리를 존중해 성을 부여(夫餘)라 했다. 여(餘)는 바로 여(余)와 통해 쓰는 글자이다. 그래서 백제말엽에는 왕족들이 余로 성을 삼는 경우가 많다. (중략) 서기 622년 백제의 멸망으로 의자왕과 태자 등 왕족들은 唐餘으로 강제이주되어 장안의 백제촌에서 한 많은 삶을 살게 되었으며 당이 망하고 새로 宋는나라가 건국된 후에야 그곳에서 우월한 혈통인 백제왕족 余氏 一族이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도 학문이 뛰어나고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휘 善才公은 과거에 오른후 승진을 거듭해 간의대부란 높은 직위에 오르시었다. 백제왕가의 후예임을 긍지로 삼고서 조국과 백제를 멸망시킨 중국 땅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를 항상 자책해 오던 공은 천자가 직간을 받아들이지 않자 감연히 조국 땅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때는 고려 선종원년 갑자로 단기 3417년, 서기 1084년이었다. 고려국왕은 크게 반기면서 극진한 예로 대우했다. 공을 의령군에 봉하고 의령을 식읍으로 내려 정착케 하였다. 이로써 余氏는 의령을 새로운 관향으로 삼게 되었고 공께서는 의령여시의 시조가 되신 것이다.(이하 생략)”고 기록하고 있다.
대종회는 시조공 묘역현창사업과 기적비 제막에 공로가 많았던 여영록 대종회 사무총장에게 공로패를, 의령의 화성석재공업사에게는 감사패를 각각 수여했다. 박해헌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