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우식 선생과 백산상회
이우식(이우식 선생 기념 사업회 회장)
이우식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령읍 장날을 기하여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의령의 3·1운동을 주도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다 1920년 귀국하여 부산에서 안희제(安熙濟), 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柱式會社)를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한인은행(韓人銀行)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서울에서 시대일보(時代日報), 1927년에는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창간하여 경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전신)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지원하였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했으며,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 지원을 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서울에서 국가적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이인, 이은상(李殷相), 이극로(李克魯), 이윤재(李允宰) 등과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하여 재정 지원을 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국 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고 출옥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2년 3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
남저 이우식(李祐植) 선생은 1891년 7월 22일 경남 의령읍 명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민족 사상에 젖은 교육을 받으셨고, 1921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를 수학하시니 일찍 앞선 생각을 지닌 선각자이셨다. 곧은 성품으로 넉넉한 재산을 가졌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몸은 검소하셨고 겸손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평소 뜻을 가진 사람과 학문하는 선비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도우셨다.
그리하여 선생의 주변에 있는 많은 벗들과 후배를 길러서 해외 유학까지 시키시어, 나라의 큰 일꾼이 되게 함으로써 나라의 흥망성쇠가 인재 교육에 달렸음을 일찍이 깨우쳤으니, 그 대표적 인물로 국방장관을 지낸 신성모, 해방 후 월북한 국어학자 이극로 등이 있었다.
1910년 19세 때 나라를 잃은 뒤로는 항상 망국민의 설움과 겨레 문화의 쇠멸을 걱정하시다가 조국 광복을 꾀하는 갖가지 일들을 치러내셨으니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귀국한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거금 100만원을 출자하셔서 표면상 ‘백산상회’를 세워 경영하였으니 실로 앞을 내다보신 사업이셨다. 여기서 나온 돈은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셨고, 또한 그 상회는 조선 독립투사들의 연락처로서 역할을 하였다. 1927년에는 우리 언론계의 <조선>, <동아> 두 신문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시대일보>, <중외일보>를 경영하시면서 식민 정책에 항거하셨고, 1930년에는 경남은행장, 원동무역회사 사장을 역임하셨으며, 가물거리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민족 부흥을 늘 마음속에 품으시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라의 말과 글이 겨레 생명의 원동력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글을 올바르게 다듬고 값있게 가꾸어 보려는 기운이 일어나게 되니 뜻있는 선각자들과 개인, 단체들 사이에서 사전 편찬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21년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된 이래 불합리한 시대 환경 속에서 사전 편찬의 원대한 이상을 일찍 품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몇 사람의 빈약한 힘만으로는 쉽게 성취될 일이 아님을 생각하여 은밀히 기회를 모색하던 중에 192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와 국어 운동의 적극적인 촉진에 열의를 가진 이극로를 회원으로 맞이하였다. 이극로의 열렬한 활동에 의하여 독지가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을 비롯한 개인, 사회, 각계각층의 찬동과 지지를 널리 구하여서 사전 편찬 사업을 민족 사업으로써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그 해(1929년) 10월 31일(네번째 한글기념식 날)을 기하여 서울 수표동 조선교육협회 회관에서의 기념식에 모인 각계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 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인류의 행복은 문화 향상에 따라 증진하여 문화와 언어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언어 및 문자의 정리와 통일이 합리적으로 되지 못하면 시간과 노력이 막대하니 이를 제거하기 위해 통일된 사전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고 사업 후원을 위한 준비위언 32인을 뽑았다. 그리고 사업의 구체적인 계획과 실무의 진행 방침 등 일체를 그 위원회에 위임하였다. 그 32인의 준비위원 중에는 이우식, 이광수. 최현배 등이 속해 있었다.
다음해(1930년) 1월 6일, 이 편찬회의 집행위원 전원과 조선어연구회 간사 전원의 회의에서 사전 편찬의 일반 업무인 어휘 수집 및 주해 편집 등에 관한 일은 편찬회 측에서 맡고, 우리 사전 편찬의 기본 작업인 나랏글 맞춤법의 통일 방안과 나랏말 표준어의 조사 결정 등에 관한 것은 연구회 측에서 맡기로 했다. 그러나 사전의 편찬은 글자 표기법의 통일과 낱말 표준어의 정리가 되지 않고는 체계 있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사전 편찬위원회가 일은 시작하였지만 능률적이지 못하고 또 도중에 집필진의 인원 변동도 있고 해서 진행이 매우 부진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조선어학회 측의 비상한 노력으로 1933년 10월 29일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성공적으로 완성·발표되어 온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한편 ‘표준말’의 사정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 작업도 또한 사회 각계의 기대 속에 거의 완결 단계에 오르게 된 1933년 봄, 학회 기간지 <한글>의 편집비를 담당해 오던 이우식을 비롯한 14인이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3년 동안에 편찬 작업을 완수할 약속으로 소요경비 1만원을 기증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업 일체를 조선어학회가 전담하기로 하고 새로운 자세로 실무 추진을 하게 되어다. 그 당시 일제는 이른바 ‘대동아 전쟁’ 감행의 기세로 우리 민간의 각종 문화 단체들을 함부로 폐쇄 또한 해산시키는 판국이어서 이런 불안과 위협을 나날이 느끼는 조선어학회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전 편찬이 끝날 때까지는 필사적인 일념으로 모든 박해와 치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시로 강요되는 근로 봉사, 국방헌금, 궁성요배, 같은 행사와 현금 갹출로 안팎으로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한 사전 편찬상의 애로로 애초 야곡했던 3년이 지났지만 목표 기한을 1년 더 연장하였다. 그리하여 소요자금 3천언을 추가 제공하여 편찬 사무를 주야로 강행하고 총독부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33년 연말에 원고 작성이 완료된 일부를 총독부 도서관에 출원하고 다음해(1940년)에 많은 부분의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허가가 나왔다.
이렇게나마 출판 허가가 나오게 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알고 나머지 원고 편성을 서둘렀지만 1940년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6년 0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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