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모 전 재판관의 40년 법관인생
“국민 납득 못하는 법 해석은 허공의 외침”
이영모(李永模) 전 헌법재판관이 지난 7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평소 ‘법은 국민의 심장’이라고 강조해온 그의 40년 법관인생을 통해 법철학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헌재 결정은 시대적 요구 반영
이영모 전 헌재 재판관은 퇴임식(2001.3.22)에서 “헌법은 단순히 법 조항을 나열한 문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생명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50개월간 헌재 재판관으로 재임하면서 역대 재판관 중 가장 많은 108건의 소수의견을 제시한 것을 두고 당시 법조계 일부에서는 그의 소수의견이야말로 ‘국민의 다수의견’을 대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의 소수의견은 ‘국민의 가슴’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향 의령에서 의령농고를 중퇴한 뒤 경남도 공채에서 5급 공무원 갑류(현재 8급)에 합격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 뒤 내무부 7급 촉탁직으로 ‘특채’됐지만 5·16쿠데타로 내무부를 떠났다. 하지만 틈틈이 고시공부를 해온 덕택에 3개월 만에 고등고시 사법과(13회)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여 년간 법관·재판관으로 법복을 입으면서 그가 한결같이 유지해온 사법철학은 기득권자보다 소외자, 강자보다 약자의 편에서 법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국가가 재판관에게 정치적 식견을 요구하는 것은 헌법이 단지 ‘법률가의 문서’가 아니라 ‘국가 생명의 전달 수단’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재판관은 인격이나 감정도 없는 형식적인 법률 대변인 역할만으로는 그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
“헌법은 ‘모든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생명’이기에 헌법의 해석 또한 ‘국민의 상식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따라서 헌재의 결정은 한 시대의 절실한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이 전 헌재 재판관이 재판관 퇴임식(2001.3.22) 때 밝혔던 퇴임사의 한 구절로서 그의 40년 법조인생의 법철학을 엿보게 한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요지의 퇴임사에 대해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헌재에 몸담고 한 일을 통해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지만 국민들께 우리 기관이 어떤 일을 한다는 보고서였고, 헌재에 남은 분들에게는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뜻을 담은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며칠 뒤 한 신문은 이 전 재판관을 미국 연방대법원의 전설로 남아 있는 ‘위대한 반대자’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Jr. 1841∼1935) 판사와 비교해 그가 그동안 남긴 65건의 소수의견서에 주목했다. 소수의견 중에서도 그는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단독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해 그때마다 여론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직접 의견서를 쓴 것도 55건이나 됐다.
경제적 약자 소외계층 관심
그의 판결권은 산술적으로 헌재 결정의 9분의1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때로 다수의견보다 더 큰 울림으로 사회적으로 공명(共鳴)됐다.
지난 2000년 4월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린 ‘과외금지사건’에 대해 그가 단독으로 낸 합헌 의견은 특히 화제가 됐다. 이때 헌재 전원재판부는 과외교습의 원칙적 금지가 자녀인격의 발현권과 부모의 교육권에 대한 과다제한이며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 사건의 법률조항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 전 재판관은 이에 대해 “헌재의 위헌 판단은 결과적으로 개인 과외교습을 제한없이 자유롭게 허용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면서 “교육적·사회적, 정책목적 실현을 위한 이 사건의 법률조항은 입법 목적의 정당성은 물론 수단의 합리성을 갖춘 입법이므로 과외교습자와 학부모, 학습자의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논박했다.
그의 이러한 의견은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서도 비롯된 것이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 그는 두 아이들의 중학 진학을 앞두고 직장생활에 위기감을 맞기도 했다. 그는 당시 과도한 과외비 부담으로 변호사 개업까지 고려하다 5공 정권의 과외금지 선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그는 서울고법원장 시절에도 유능한 후배 법관들이 사교육비 때문에 법복을 벗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그가 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소수의 길로 들어선 데는 이러한 경험이 토양이 됐다. 퇴임사에서 그는 이러한 헌재 결정문에 비추어 헌재는 앞으로 “헌법과 복지관계법에 따라 적극적으로 경제적 약자나 소외계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소수의견 대변
고법 부장판사 시절 그는 판결원본을 통해 판결선고를 내리는 판사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자연히 사건처리가 빨라지고 사건 당사자들은 판결원본을 1주일 이내 최단 기간에 송달받는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형사지법원장 시절에는 또 약식사건 처리를 전산화해 법원행정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창원지법-서울형사지법-서울고법 등 그가 책임자로 거쳐온 법원들에서 직원들은 그의 꼼꼼한 성격 때문에 그를 ‘시어머니’로 불렀고, 법원마다 ‘이영모 행정스쿨’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1994년 서울고법원장을 끝으로 사법부를 나서면서 그는 한때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다시 이용준 전 헌재 소장이 사무처장 자리를 제안해와 헌법재판소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특유의 행정능력을 발휘해 헌법재판소의 재동시대 살림을 이끌어오다 헌법재판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40여 년간 법관·재판관으로 법복을 입으면서 그가 한결같이 유지해온 사법철학은 기득권자보다 소외자, 강자보다 약자의 편에서 법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민 다수의 가슴을 울리는 소수의 고독한 길이었다. 특히 헌법재판관 시절의 고독한 소수 반대자의 목소리를 그는 ‘황야의 외침’에 비유하기도 했다.
헌재에서 ‘살아 있는 소수의견’을 낸 그에게 헌재 연구관들과 후배 법관들은 퇴임식에서 그의 결정문을 모아 “소수와의 동행그 소리에 귀를 열고”라는 표제를 달아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