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허원보의 의령군
가례 이주에 따른 지명 형성’
허만길 박사, 본지 논문 기고
조선 전기 의령군 가례
지명 형성과 변천 과정 밝혀
의령군 칠곡면 출신 서울 거주 향우 허만길 문학박사(시인·전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가 본지특별기고 논문(‘의령신문’ 제316호. 2012. 12. 28) ‘조선 전기 허원보의 의령군 가례 이주에 따른 지명 형성’ 연구에서 여러 새로운 사실을 밝혀 조선 전기 지명 연구에 큰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고려 말 중요 충신이었던 호은(湖隱) 허기(許麒)의 증손자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1480년경 혼인 후 경남 고성에서 의령현 가례(현재 의령군 가례면)로 이주하여 새살림을 꾸림으로써 그와 그의 후손과 인척은 조선의 15세기 전성기에는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16세기 말 임진왜란(1592〜1598년) 때는 구국의 역사적인 사명 활동을 다하였음을 ‘의령신문’ 제298호(2012. 3. 23.), 제305호(2012. 7. 13.), 제310호(2012. 9. 28.)에 소논문으로 발표한 허만길 박사는 예촌 허원보의 의령현 가례 이주에 따른 의령군 가례면 지역의 주요 지명이 어떻게 새로이 형성되고 어떻게 불리었으며, 오늘날 그 지명이나 지명의 위치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다양한 자료 연구를 통해 밝혔다. <논문 3면>
‘가례(嘉禮)’는 허원보가 지은 이름이며, 그의 호 예촌(禮村)은 ‘가례(嘉禮)’의 끝 글자를 따서 역시 그가 지은 것이라는 허씨 종중에 전해 오는 말은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일이며,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이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 추측은 가능성 없는 일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 허 박사는 ‘백암’(白巖) 정자(백암정)는 허원보가 최초로 건축하고서 이름도 직접 지어 현판을 걸었으며, ‘김해 허씨 세보’(권1)에 제목 없이 실린 시가 ‘탁영 선생 문집’(濯纓先生文集)에 ‘宜寧駁川與許上舍元輔同遊’(의령 박천에서 허진사 원보와 함께 놀며)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음을 확인하고 백암정 앞의 내(川) 이름은 ‘박천’(駁川)이었다고 밝혔다. 허 박사는 퇴계 이황이 1533년 봄에 남도여행(남도유람)을 하면서 의령현 가례 처가에 머물며 지은 매화 시를 근거로 허원보가 살던 마을 이름은 ‘백암촌’(白巖村)이었으며, 따라서 조선 전기의 가례는 가례 마을이 아닌 현재의 가례면 지역에 해당한다고 했다. 백암촌이 가례에서 가장 번창했던 까닭으로 가례와 백암촌을 동일시한 데서 백암촌은 ‘가례(嘉禮)’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 지방 행정 구역의 면리제(面里制) 정착에 따라, 면의 이름 글자와 마을의 이름 글자가 꼭 같음으로써 동자이의(同字異義·글자는 같으나 뜻이 다름)의 불편이 많았기 때문에 그 불편을 줄이기 위해 가례(嘉禮) 마을은 가례(嘉禮)면의 한자와 달리하여 가례(加禮) 마을로 바꾸어 쓰게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도 허 박사는 백암촌과 수성과 가례동천의 위치 관계를 밝히면서 조선 전기에 퇴계가 이름 붙인 수성(修誠) 마을과 현재의 수성(修誠) 마을의 위치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허 박사는 의령군 가례면의 조선 전기와 중기에 걸친 인물 중심의 역사를 연구하여 이미 ‘의령신문’에 발표한 것과 이번에 의령군 가례면의 조선 전기의 주요 지명 형성 과정과 변천 과정의 연구 내용을 두루 살펴보아, 의령군 가례면은 역사적 인물의 향기와 역사적 지명 가치가 위대한 땅이라고 평가했다. (자세한 내용 허만길 문학박사 논문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