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의령군청서 개최… 우륵 출신지 규명 등 기존학설 재조명
우리나라 3대악성의 한명인 우륵의 출생지 성열현(省熱縣)이 지금의 의령군 부림면 일대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태식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22일 의령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학술대회에서 <우륵 출신지 성열현(省熱縣)의 위치>란 주제발표를 통해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우륵의 출신지라고 기록된 성열현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문헌사와 고고자료, 음운학점 검토를 통해 기존의 고령설, 청풍설, 가조설, 대구동구설 등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의령 부림설의 당연성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발표를 통해삼국사기 등을 보면 성열현은 6세기이전까지는 가야영역에 속했으나 644년에는 백제에 속했고 647년에는 신라의 영토에 속했던 곳으로 후기가야연맹에 속했던 소국인사이기국을 지칭하는 것이라며사이기국이 있었던 곳이 의령군 부림면이라는 학설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우륵의 출신지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가 하는 점에 대한 논의가 가야사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며 역사학에서 지명 고증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인 만큼 성열현에 대한 모든 논리들을 정리하고 해당 지명과 관련된 기록들을 가야사 및 신라사의 전개과정과 연관하여 종합적으로 연구 발표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현재까지 제기되는 학설 중 고령설에서‘성열현이라는 지명이 대가야 당시의 것이며 대가야 주위에는 가야연맹에 소속된제국(諸國)이 있었으므로, 성열현은 대가야 관내에 있는 직할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지명을 전하는 신라고기(新羅古記)의 용례로 보아 성열현이라는 지명은 가야 멸망 후 신라의 것이며, 대가야 시기에 수도에 현을 설치했다는 주장도 가야의 사회 상황을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청풍설(淸風說)에서는 지명 발음의 비슷함과 함께 제천 의림지 및 음성 일대에 전하는 전설과 둑 이름을 근거로 내세웠으나, 제천 지역은 가야 영역 내에 포함된 적이 없었으므로 적절치 않으며, 제천과 음성의 둑 이름 및 전설은 우륵이 말년에 충주에 안치된 이후 생긴 것이거나 혹은 조선 후기 이후에 유포된 것으로 추정했다.
가조설(加祚說)에서는 성열이라는 한자 지명이소사리라고 발음되었으며 그것이 현재 가조면 성초(省草) 마을의 지방 발음인소새와 같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설명만으로는 전국의 35개 이상의소사리및소새지명 중에 어째서 거창군 가조면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약하고 사료에 나오는 성열현은 이(里) 이하 마을 단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대구광역설(大邱東區說)에 대해서는 대구지역이 백제에게 함락된 적이 없었으며, 644년과 645년 당시 백제와 신라의 주요 전장은 낙동강의 주요 진처인 구미-우곡-부림-삼랑진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에 따라 지금까지 우륵의 출신지인 성열현 및 성열성(省熱城)을 둘러싼 여러 학설 중에 기존에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부림설(富林說)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날 백승충 부산대교수도사이기국은 부림면에 있었던 소국으로 가야세력과 신라 왜 등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하다 6세기전반 신라백제의 영향력 확대로 결국 신라에 병합됐다고 김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밖에 남재우(창원대교수), 권주현(영남민족문화연구소), 김상철(의령박물관학예사) 씨 등도 우륵의 당시 활동상과 의령지역의 가야 정치체의 존재 및 성격규명을 통해 우륵의 의령 부림설을 뒷받침하는 논지를 제시했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부림문화발전연구회(이사장 조용섭)가 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소장 이승복)에 용역을 의뢰한 6개 분야의 중간결과를 놓고 발표와 토론을 벌이는 형식으로 7시간동안 진행됐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에 정영조 재경의령군향우회 원로회장, 김승곤 한글학회장 등 재경 향우 23명이 단체로 학술대회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