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물불’ 이극로는 독립군이 되고자 당시 독립 운동의 중요 거처지인 만주 서간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독립 운동가 박은식, 윤세복, 신채호를 만났으며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김진과 김두봉에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의 한 일화를 보면 이극로가 압록강 근처의 한 식당에서 사투리 때문에 겪은 어려움을 보여주는데 이는 후에 그가 한글의 표준화 작업에 매진했던 동기의 시발점이 된다. 아침밥을 먹는데 고추장이 없어 그것을 청했더니 식당주인이 알아듣지 못했다. 온갖 몸짓 발짓으로 설명을 하자, 주인이 ‘오, 댕가지장 말인가?’ 하고 내놓았다. 이게 이극로는 ‘어째서 같은 겨레로서 이토록 말이 달라서 의사를 통하기 어려운가!’라고 함숨을 지었다. 이후 이극로는 만주를 떠나 러시아로 가게 되는데 도중에 여비가 떨어져 도보로 여행을 했어야 했으며 뜻하지 않게 어느 집에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이때에 당시 러시아를 여행 중이던 소설가 이광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후에 서술하길 이극로가 서간도에서 시베리아 치타까지 ‘노자가 없으니 걸어왔소’라고 태연하게 말한 것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5년 후 상해에서 만났을 때도 이광수는 ‘치타에서 상해까지 걸어왔소?’라고 물었더니 이극로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광수는 친일파가 되었지만 후에 이것을 다시 회상하며 이극로를 ‘몸과 마음이 튼튼한 은인’으로 평가하면서 ‘그가 조선어학회를 수십 년 지켜온 것도 이 걸어오는 고집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후 이극로는 상해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동제대학에 다니면서 상해 유학생 총무를 맡으며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1922년 독일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서구로 유학을 결심한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학비를 지원 받을 곳도 없었을 테지만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의지가 그를 이끌었다. 아무래도 격변하는 세계사 속에서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보자라는 그 선구자적인 역사적인 감각이 그를 독일로 이끌었을 것이다. 당시에나 지금에나 베를린 대학은 독일의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이극로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빈민촌의 빵 굽는 집 위층에 살았으며 찬물만 마시고 하루 이틀씩 굶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베를린 대학에서 그는 당시 세계적인 석학인 좀바르트, 뮐레르, 루른왈트,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었으며 1927년 정치경제학 박사를 취득한다. 재학 중에는 언어학을 부전공으로 택하면서 한국어과를 개설하고 조선어 강의를 담당했는데 이는 한국인이 서양에서 최초로 설립한 한국어과이자 한글 강좌이다. 당시 그는 어느 한 프랑스 학생으로부터 ‘당신의 나라는 사전이 없다니 참말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상당히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이때 받은 부끄러움은 귀국 후 그가 사전 편찬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는 동기가 된다. 또한 그는 당시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약소민족 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의 식민정책을 고발하면서 ‘한국의 문제’와 ‘조선 근세사’의 제목으로 소책자를 집필하여 배포하였다. 그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처럼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투쟁은 우리를 자유의 삶으로 인도할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거나 우리 한민족이 불행과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는 날, 이 둘 중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졸업 후 이극로의 한글에 대한 관심은 당시 음성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들이 모여 있는 파리와 런던으로 그를 이끌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세계 최초로 한글 음성학을 실험하였다. 그 결과를 그는 국제 음성학 학회에서 발표하였으며 해방 후에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성학 단행본인 ‘실험 도해 조선어 음성학’으로 이어졌다. 영국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아일랜드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영어가 켈트어인 아일랜드어를 잠식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라며 생각하며 향후 귀국 후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이후 미국의 주요도시를 돌며 한글에 대한 강연을 했다. 1928년 샌프란시스코 강연에 대한 자료를 보면 당시 그가 장차 어떠한 방향으로 한글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의와 계획을 볼 수 있다. 그는 ‘국어가 민족의 생명이기에 가장 급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모국어를 잃어버리면 그 나라는 민족성을 잃게 됩니다’라고 한 나라의 문화에 있어서의 모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어 그는 한글운동의 방법으로 사전을 편찬하여 한글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것과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제정, 철자법 통일, 그리고 국한문 혼용을 피하고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한글의 가로 쓰기를 제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