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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면-5회 연재. 대종교 총본사 환국기념(1946.6.16)사진.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극로 | 이극로는 경남 의령 지역에만 국한된 인물인가? 아니다. 남북한의 동포가 존경할 인물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정보강국이 된 동력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족의 문자인 한글에 있었다. 일제시대와 해방정국기 조선어학회 학자들의 노고가 한국 민족에게 남긴 공적도 거기에 있다. 문화강국은 한민족 생존의 정치·군사·경제강국의 토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글은 한민족의 보배요 자랑거리다.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된 한글은 주시경에 의해 과학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주시경의 죽음 때문에, 그의 유지는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최현배와 이극로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극로는 1929년부터 조선어학회 동지들과 상의하여 한글날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나라 없는 시기 서울 한복판에서 그는 한글날 행사를 조선민중을 참여시켜 치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 이 날에 그는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행사를 벌여 한국민족에게 한글에 대한 민족적 관심을 유발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였으며, 1934년에는 조선어학 도서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936년에는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부터 일제는 이 기념식마저 열지 못하게 탄압하였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1945년 10월 9일 한글날 행사에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이었기 때문에 기념식사와 기념 방송을 하였다. 이 날을 위해 그는 한글노래를 작사하였다. 이 노래가 기념식장에서 불러졌다. 다음은 한글노래의 가사이다. “1)세종 임금 한글 펴니 스물여덟 글자 사람마다 쉬 배워서 쓰기도 편하다. 2) 온 세상에 모든 글씨 견주어 보아라 조리있고 아름답기 으뜸이 되도다. 3) 오랫동안 묻힌 옥돌 갈고 닦아서 새빛나는 하늘아래 골고루 뿌리세. 후렴) 슬기에 주린 무리 이 한글나라로 모든 문화 그 근본을 밝히려 갈거나.” 1946년 한글날 행사도 그가 개식 선언을 하였다. 이 해부터 한글날은 남한에서 국경일로 지정되어 공휴일이 되었다. 1947년 한글날에는 그가 앞장서서 작업한 ‘조선말 큰사전’ 발간식도 겸하여 행사를 치렀다.
한편, 이극로는 일제시기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교주였던 윤세복과 연계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 대종교에서는 개천절 행사를 매년 열었다. 동창학교 시절 이극로도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매년 대종교도와 함께 개천절을 기념하여 경축하였다.
이극로는 1936년 8월에 만주 동경성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찾아가, 교주 윤세복(독립운동가)과 함께 단군성전의 건립문제를 논의할 정도로 대종교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였다. 실제로 그는 대종교 제4대 교주로 촉망을 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위상 때문에 해방 뒤 그가 개천절 행사를 주관하였던 것이다. 1945년에 거행된 개천절 행사에 그가 개회사를 하였다. 1946년에는 개천절이 국경일로 정해졌다. 이 해에 대종교총본사가 주도하여 강화도의 첨성단에서는 성화제를 거행하였는데, 이극로가 경축사를 하였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극로가 일제시기와 해방정국기에 민족문자의 반포일인 한글날 행사와 한국 민족의 건국절인 개천절 행사를 주관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재를 마치며 필자는 이극로 기념사업의 시작으로 의령의 생가를 복원하고, 마을 근처에 기념관을 건립하기를 제안한다. 이곳이 청소년 교육장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한민족과 한글을 지독히 사랑한 그의 삶과 정신을 남북한 동포들이 계승하기를 바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