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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박강수 총장의 세상이야기

케네디 가문의 성공과정

박강수 배제대 전 총장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04월 22일











▲ 박강수
케네디는 서민들에게 희망을 준 대통령이다. 나는 미국 대통령 중에 케네디를 제일 좋아한다.


비록 케네디는 비명에 갔지만 케네디의 멋과 리더십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더욱이 100여 년 만에 대통령을 만든 케네디 가문의 가정교육은 흔히 말하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을 떠올리게 한다. 케네디 같은 서민을 위한 서민의 대통령이 그립다. 케네디 가문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용광로와 같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케네디 가문은 귀족도 부자도 아니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삼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패트릭 케네디에서 출발한다. 패트릭은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이다.


증조부인 패트릭 나이 22살 때(1848년) 이렇게 굶주리며 사는 것 보다는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민 가서 열심히 사는 것이 가난을 면하는 길이라고 결심하게 된다.


1848년, 아일랜드는 흉년으로 기근이 극심하던 해였다. 드디어 그는 2개월이나 걸리는 미국행 배에 식구들과 함께 몸을 실었다. 이민자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패트릭도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일념으로 미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릿고개처럼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은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패트릭은 생각했다. 영국이 지배하는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촌에서는 더 이상 미래와 희망을 기약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1848년은 마침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패트릭이 정착한 곳은 비교적 영국계가 많이 살고 있는 보스턴 근처였다. 젊고 투지에 찬 패트릭은 위스키 통을 만들어 팔면서 가세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남 3녀의 아버지인 패트릭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그 한을 미처 풀지도 못한 채 2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죽자 패트릭의 부인은 문구점을 차려 겨우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외동아들 조지프는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되어 아버지의 한인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생각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제법 돈이 모아졌을 때 그 돈으로 뒷골목에다 선술집을 차렸다.


조지프는 술장사를 하면서도 이민 온 아일랜드 사람들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결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조지프의 선행은 이민사회에서 그가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상징되었다.


이렇게 이민사회에서 신망을 얻은 조지프는 우리나라로 치면 도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는 행운을 얻으면서 신분을 바꾸게 되었다.


말하자면 케네디가가 처음으로 정치계에 입문을 하게 된 셈이다.


그 때 정적은 영국계로서 도의원과 보스턴 시장을 역임한 존 프란시스 피츠제럴드 가문이었다. 수백 년간 아일랜드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열등민족이라는 편견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 영국계의 대부 같은 피츠제럴드 가문과의 정치적 대립은 힘겨운 일이었으나 마치 셰익스피어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후일 두 가문의 아들과 딸이 결혼하는 운명적인 순간을 연출하게 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마치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처지와 비슷했다. 아일랜드계인 케네디 가문은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영국민들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케네디가 에서는 자녀들에게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항상 일등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조지프는 아들들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처럼 영국계가 꽉 잡고 있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시켰다. 손자인 3대 패트릭은 아일랜드계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지 3년 만에 은행장이 된다. 더욱이 영화사업과 경마장사업 등으로 30대에 이미 그 지방에서 재벌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케네디가의 치밀하고 잘 짜인 가통성장 계획은 이렇게 이민 3대째부터 성공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보스턴의 명문가 자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케네디 가문이 되었다.


드디어 그는 정적이었던 보스턴 시장의 딸 로즈와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미국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대통령 존 F 케네디이다.


이민 후 4대 110여년 만에 감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 가문이 되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결과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가 목표를 공유한데서 명문가가 되었다. 당시 흑인보다 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아일랜드계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었다.


실은 케네디 대통령은 우수한 형의 그늘에 가려 한 때는 청소년기를 문제아로 보내기도 했으나 형이 제 二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자 고작 교사나 작가의 꿈을 꾸던 케네디는 왜소한 꿈에서 깨어났다. 4남 5녀의 어머니 로즈는 자녀 교육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엄한 가정교육이었다.


즉, 아버지가 우리에게 불꽃같은 존재였다면 어머니는 삶의 빛이었다.


존 F 케네디는 가문이 준 교훈과 본인의 열정적인 도전으로 모든 것을 해냈다. 나는 그와 그의 서민정신을 좋아한다.

편집부 기자 / 입력 : 2011년 0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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