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마디 말로 ‘길’이란 말보다 더 좋은 뜻을 가진 말도 많지 않다.
최근 4대강에 자전거길과 보행길이 완성되면서 전국 각지에 좋은 길이 생겨 걷기 붐이 일고 있다. 제주의 올렛길, 부산의 갈맷길, 지리산 둘레길 등 이름도 고운 길들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고향 의령에 ‘부자길’ 조성 소식은 참으로 반갑다.
‘부자길’은 호암을 연상시켜주는 길이다.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꿈, 부자 한번 되어 봤으면 하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라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기분은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길은 좋은 이름 못지않게 그 길에 깔려있는 역사나 문화가 있다면 말할 것 없고 오랜 세월 전해져 오는 전설이나 구전 설화 같은 것이 있다면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에는 얼마간의 과장은 재미를 유발한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지어낸 이야기는 오히려 그 길에 기대했던 매력까지 잃게 한다.
‘부자길’이 호암을 연상시키는 길이면 호암 생가에 대한 잘못 알려진 기록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마당가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노적봉에 대한 것이다. 노적봉이란 호암의 선대가 지금의 중교리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죽전리 오암부락 앞의 산을 가리킨 것이다.
표지석의 노적봉이란 글은 누가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호암 이후 이곳을 찾는 후손이 없는 상황에서 중교리와 선대 뿌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재단과 삼성관계자가 만들어 낸 것이라 생각되지만 생가 안내를 하는 해설자도 노적봉 운운하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호암은 일찍이 어느 일간지에 연재한 자서전에서 생가 뒷산이 뱀(꼬리)같다고 쓴 적이 있다. 용(龍)이라 쓰지 않고 뱀으로 표현한 것은 허장성세(虛張聲勢)를 싫어한 호암의 실사구시적 인품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용은 실체가 없는 상상 속의 동물로 수천가지로 형태가 바뀌는 변화무상의 동물이라 뱀도 되고 미꾸라지 형상으로도 바뀐다. 일반적인 유형으로는 용은 말과 같은 얼굴에 소뿔 같은 것이 있는데 호암생가 뒷산 용미를 따라가면 유곡면 경계 막실재 좌우에는 마두(馬頭)란 동네 뒷산과 소뿔 같다하여 우봉산(牛峯山)이 있고 이 산은 두곡, 담안 마을까지 아우르며 정곡초등학교 앞까지 내려와 월현천에 머리를 잠그고 있는 잠용으로 호암생가는 용반산세에 용미혈에 위치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호암생가의 노적봉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길이 중다리(中橋里)를 출발하여 호미(虎尾)를 돌아오는 코스임으로 중다리와 호미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뺄 수 없다. 중다리는 순수 우리말로 표현하면 ‘가운데다리’다. 남자의 상징이면서도 인체에 가장 신묘한 부분이다. 양반고을 선비의 점잖은 표현으로 중교 또는 중다리라 했지만 ‘가운데다리’에 대한 이 지역 민속적 이야기는 많다.
필자의 항렬은 집안 모두 쇠북 종(鍾)자인데 나만 쇠금(金)을 써서 부른다. 오행상으로는 같은 것이나 어릴 때는 놀림꺼리가 되었다. 왜 나만 그렇게 부르느냐고 했더니 할머니는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마음이 상한 나는 어디 있는 다리냐고 물었더니 “왜 가볼래? 중다리에 있는 가운데다리다” 하시면서 박장대소를 하셨다.
어쨌든 중교리 가운데다리는 삼성 총수를 낳았으니 그 다리에 관한 설화는 맞다. 그럼에도 호암의 자손들은 그들이 태어났고 자란 이곳을 찾지 않는다. 롯데나 LG 총수들의 고향 사랑에 비추어 보면 이곳 사람들의 서운해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자길’의 회귀점은 호미(虎尾) 마을이다.
월현천을 따라 서남쪽으로 가면 상큼한 풀내음과 들꽃향기에 마음은 즐겁고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어느새 남강에 이르는데 이곳이 전설적인 마을 호미, 호랑이 꼬리다. 호랑이 꼬리를 밟고는 살아남는 자는 없다. 단 하나 살 길은 호랑이를 타야한다. 꼬리를 꽉 잡고 등을 타는 길은 암벽으로 된 탑바위 뒷산을 오르는 것이다. 호미에서 한참 걸어 오르면 짤룩한 꼬리 끝 부분이 나오는데 거기부터가 호랑이 등이다. 힘들어도 타고 보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바위 같이 단단한 등뼈지만 편편한데다 부드러운 풀 같은 털이 포근하다. 어느 듯 고개에 이르면 천애의 절벽 위에 맹호가 진주쪽 남강을 응시하며 서 있는 산 진등재다.
진등재는 용덕면 정동리에서 정곡면 죽전리 호미마을까지 이르는 산이고 산 아래 암벽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으르렁대는 호랑이 소리 같다. 남강댐이 없을 때 지리산 진주 방면에서 흘러오는 물로 우기 때면 남강 유역인 의령과 함안을 물바다로 만든다. 밀려오는 물살이 용덕 정동에 이르면 한풀 꺾인다. 네발을 강바닥에 박은 채 온몸으로 물길을 막고 포효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맹호의 위세에 노도마저 숨을 죽여가기 때문이다. 호미를 지나야 다시 물살이 거칠어지고 월현천을 넘어다보게 된다.
진등재에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살고 있었다. 이 고개는 산적들도 있었는데 정곡쪽에서 의령장에 가기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시장에 소를 팔고 오다가 만나는 도적들과 호랑이의 얘기는 스토리텔링 같은 실화도 있다.
외가가 의령 중리인 필자는 어머님과 함께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머님 치마 속에 숨어서 가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은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면 섬뜩해도 큰 짐승을 만나면 훈훈하다 하시며 밤에 진동재에서 만나도 큰짐승은 이산의 산신령님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외조부의 부음을 받았을 때도 도적이 있는 낮이 아닌 밤에 이산을 넘으셨다고 한다.
산적들이 길을 막고 해꼬지를 하려하면 어느새 나타나 도적을 벼랑 끝 강바닥으로 던져버리고 고개를 넘어 갈 때까지 길을 밝혀주는 호랑이 이야기는 어린 나에게도 감동과 스릴을 주는 최고의 스토리텔링이었다.
호미는 원래 나루터였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박목월의 나그네 시구(詩句)가 생각나는 곳이다. 강물이 마르면서 지금은 백사장도 밀밭길도 서리하던 수박, 참외밭과 땅콩밭 등 강변의 풍경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비오는 날이나 비 개인 후 탑바위 진등고개에서 바라보는 함안들과 남강변에 깔려있는 솜 같은 운무가 깨어나면서 서서히 강을 건너 탑바위쪽 바위를 감싸오르다가 진등고개로 넘어가는 장면은 한폭의 동양화로서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의령 구경(九景)에 하나 더 보태어 의령 십경(十景)으로도 손색이 없다.
‘부자길’은 용, 호의 기운이 서려있는 곳이다.
경제적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용의 기운이 강한 중다리에서 용꿈을 꾸고, 정치적 입신양명을 바라는 사람은 호미와 진등재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호랑이 꿈을 꾼다.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용도 보고 범도 본다고 했다. 경제대통령이 난 이곳에 꿈꿀 인프라 하나 없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다. 그럼에도 ‘부자길’은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걸어온 길이 고달팠던 사람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길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