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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20년 10월 16일
전통 한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재경 궁류면향우회 고문 임명석 우림화랑(佑林畵廊) 관장
지난 6월 25일 봉수면 신현세 전통 한지 공방에서 진행된 경남도 무형문화재 신규 종목 ‘한지장’ 보유자 인정 현지조사 모습.

  지난 6월 25일 봉수면 신현세 전통 한지 공방에서 경남도 무형문화재 신규 종목 ‘한지장’ 보유자 인정 현지조사가 진행됐다. <의령신문 2020년 7월 9일자 제547호 12면 보도> 의령 전통 한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재경 궁류면향우회 고문 임명석 우림화랑(佑林畵廊) 관장이 우리 의령 전통 한지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보는 기고문 ‘전통 한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보내왔다. <편집자 주>

우리 전통 한지의 고장, 의령 봉수면에서 만든 한지에 대한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이웃 부림면 신반에서 한지 축제가 열리는데 금년엔 코로나로 인하여 취소된 것 같다.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한지의 다양한 기능과 또한 한지로 만든 공예 등 한지의 독창적이고 특수성을 재해석하며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 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 한지의 자태를 잃지 않고 장인정신 속에 애환이 담겨있는 우리 한지이다.
우리는 한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 닥나무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라는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 전통 한지의 우수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재조명하는 뜻에서 각종 문헌을 찾아 정리하여 보았다.
우리는 전통 한지 원산지 과연 의령 봉수면인가?
고려시대 의령현(宜寧縣) 지촌리(紙村里) 국사봉(國師峯) 아래 대동사(大同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설씨(薛氏) 성을 가진 승려(僧侶) 주지스님이 최초 한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어느 봄날 이 주지승은 닥나무를 꺾어 지팡이로 사용하다가 절 앞 반석 위에 앉아 그 지팡이를 두드렸는데 다음날 와 보았더니 닥나무 껍질이 반석 위에 말라붙어 얇은 막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본 스님은 닥나무껍질을 벗겨서 돌로 찍고 두들겨 반석위에 늘어놓고 다음날 다시 와보니 껍질이 서로 엉켜 붙어 말라 있었다. 주지승은 여기에서 착상을 얻어 한지를 발전시켜 만들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국사봉 아래 대동사 창건 시기는 신라시대로 짐작된다. 당시 사지(寺址)를 승명 하듯이 석탑 축과 기둥 석축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67년 대동사지 주변에서 엄필섭 씨에 의해 금동입불상이 발견 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확인되었으며 귀중한 문화재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통한지 지촌리 지명표기(地名表記)
성종12년(1418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50권卷』에는 의령현(宜寧縣) 지촌리(紙村里)로 표기 되어있다. 또 고려사『高麗史1449-1451』에는, 고려시대 충숙왕(忠肅王27대) (1318년) 한지의 원산지라는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지촌리 표기는 그 이전부터 전해 왔으리라 짐작된다. 일정시대(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봉수면으로 개칭(改稱)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절터에서 불상이 출토되고 고려시대 지역 명이 지촌리로 기록된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한지 생산이 전래 되어 왔으리라 추정 된다. 단 문헌이나 사기(史記)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설은 있지만 역사 기록은 한지에 대한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3~4세기 경 백제로 먼저 들어왔을 가능성으로 서술(敍述) 되어있다. 당시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해 있고 고대부터 문물(文物) 교류를 통해 중국에서 제지 기술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 등에는 한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사『高麗史1449-1451』 편찬기록에는 고려 인종23년(1145-1186년)에 걸쳐 종이 생산을 위해 전국에 닥나무 재배할 것을 명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시대 중국으로부터 한지가 각광을 받아 종이 만드는 것을 장려했으며 공조서(供造署)라는 국가 기관을 두고 종이를 만들어 조정에 받치는 특수 지방 형정단위인 지소(紙所)를 운영하였으며 중국 남송 때 문물 교류로 수출한 기록도 전한다.
중국 당송사사『唐宋詞史』 일본 니혼쇼기 서기『日本書紀697-720년30권』 두 나라 문헌을 통해 삼국시대에 들어왔다고 기록 되어있다. 백제 고이왕(古爾王8대) 재위52년(서기285년)『경전(經典)(불경서적)』 『논어(論語)』 한지 등 일본에 전해준 기록이 있고, 고구려 영양왕(嬰陽王26대)재위(590-618)(서기610년) 승려 담징(579-631)이란 사람이 일본에 경전과 제지기술을 전해 주었다는 기록을 보아 5세기경 때에 만들어 일본에 초지법 기술을 전했으리라 짐작 된다.

종이를 최초 만든 사람
종이(紙) 최초 만든 사람은 중국 채륜(蔡倫서기50?~121). 삼(杉) 아마(亞麻) 등에서 섬유질(纖維質)인 셀룰로오스를 뽑아내 분리한 이것을 얇은 막상(膜狀)으로 걸러서 떠내어 종이로 만들어 (원흥元興서기105년)황제에게 바쳤다고 하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중국 채륜 이후 3~4세기경 종이 만드는 기술이 널리 확산 되면서 닥 나무껍질을 삶고 뚜들겨 풀어서 만든 기록을 보아 우리나라에도 그 시기에 닥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채륜이가 만든 종이 이전 유럽에서는 파피루스와 양피지가 먼저 종이 대신 만들어져 사용을 하였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자라는 사초 류 풀 이름이다. 약 2천500년 전 이풀 줄기를 이용하여 얇게 찢어 가로세로 겹쳐 놓고 방망이로 두들겨서 수분을 제거한 후 건조시켜서 두루마리를 만들어 필요에 따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사용하였다.
양피지(羊皮紙)는 기원전(197-159) 터키의 베르가마 현재 장소, 소아시아 페르가몬(pergamon)의 왕 에우메네스 2세 의하여 파피루스의 대체품으로 만들어졌으며 양피지 영어 이름은 (parchment) 이 왕조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양피지 만드는 과정은 어린 양가죽을 석회(石灰)로 표백한 후 돌로 갈아 얇게 만든 후 건조시켜 초크로 마무리한다. 파피루스 보다 견고성은 있지만 부피가 많고 무거운 것이 결점이다. 파피루스와 양피지는 종이가 양산(量産)되면서 8세기 때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전통 한지의 우수성
아름답고 우수한 우리 한지에 담긴 선조들의 과학 슬기와 지혜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만들어지는 과정은 자연 재료의 특성을 활용하여 비단 같이 희고 내구성 아주 강하며 질겨 천년이 넘은 고대문서나 경전들도 좋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입증된 것이며 고귀한 명품종이를 개발하고 발전한 우리한지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또한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간편하게 보관이 쉬우며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장점이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로부터 우수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고문서 고서적 등 지류 문화재뿐만 아니라 고가구 복원 등 다양하게 활용됨에 따라 세계적으로 문화가 앞선 국가(이탈리아)로부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종이 만드는 조지소(造紙所) 설치
태종15년(1415년) 종이를 만드는 조지소(造紙所) 관아를 왕명으로 설치하였다. 한양 창의문(彰義門) 밖에 탕춘대(蕩春臺) 지금 세금정 신영동 자리에 설치한 후 1465년에 다시 조지서(造紙署)로 이름을 바뀌었다. (신영동 표석이 있다) 경관직(京官職종6품) 1명 사지(司紙종6품) 1명 별제(別提종6품) 4명 제조(提調)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무를 다루는 목장(木匠) 2명 발 만드는 염장(簾匠) 8명 종이를 만드는 지장(紙匠) 등 8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 보조(잡일) 90명 등 180여명이 종이 만드는 일에 종사를 한 기록이 전한다.
여러 가지 종류와 최고급한지 색지 등 만들어 궁중으로 보낸 기록과 사대부들이 사용한 내역이 수록되어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고종(高宗19) (1882)년도에 467년간 이어온 관영제지 수공업이 쇠퇴하여 폐지되었다. 조선말기 고종 당시 개화정책으로 문물교류(文物交流)가 성행하면서 기계로 만든 종이가 수입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폐지 원인으로 생각된다. 전통 한지는 원료 공급과 제작 과정에서 생산성이 떨어지고 인건비로 인한 금액차 등 제지 기술문화를 따라 갈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말 한지를 생산한 곳
함경도, 원주, 안동, 전주, 경주, 의령봉수 등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종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126호)
속담에 지 천년 견 오백년이라는 말이 있다. 종이는 천년을 가고 견(비단)은 500년을 간다는 뜻으로 우리한지의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1966년 7월경 당시 도굴꾼들이 불국사 석가탑 속에 있는 사리함을 훔치려고 탑을 해체 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그해 10월경 그 사건으로 이미 기울여진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모습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추정 년대는 약 서기 751년 이전으로 밝혀졌다. 이 경은 당나라 때 704년에 번역된 기록과 불국사 창건 역사 서기 751년 이전으로 추정한 것이다. 현존(現存)하는 종이로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다. 크기(폭 6.6cm 길이 6m) 두루마리 형태로 보존 상태는 오랜 산화작용으로 인하여 부식되고 일부가 훼손되어 안타깝게 생각된다. (2015년 『고미술감정과 나의발자취』 책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대해 밝힌 바 있다.)

우리 전통 한지를 중국에서 높이 평가한 사례
송(宋)나라 손목(孫穆)봉사고려국신서장관(奉使高麗國信書狀官)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1103년』 견문록에 고려의 닥 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 빛이 고와 백추지(白硾紙)라 부르며 송나라 종이보다 월등하다는 품평 기록이 전한다. 또 명(明)나라 도융(屠隆1542-1605) 고반여사『考槃余事』 편찬기록에 조선에서 들어온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비단과 같아 견지(絹紙)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글씨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드려 이러한 종이는 명나라에도 없는 우수한 것이라 적혀있다. 명나라 서화가 동기창(董其昌1555-1636)은 조선종이가 두껍고 질겨 희고 매끈하여 글씨 그림 그리기 아주 적격이라며 극찬 했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했다.
우리나라 기록엔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1716-1787)68세 때인 1783년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에 송나라 당시 여러 나라 종이 품질을 논하면서 고려의 한지를 최고로 쳤다고 전한다. 우리한지가 가장 질기고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서 더욱 고르고 매끄러워 사용하기가 좋아 다른 나라 종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수성을 논한 기록이 있다.

전통한지 제지과정(製紙過程)
한지의 주원료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진다. 먼저 닥나무 채취. 닥나무 삶아 껍질을 벗기고 껍질을 말려 얇은 흑피를 제거하여 백 닥을 만든다. 그 다음 삶은 후 표백하여 말려 뚜드려서 콩짚대 등을 태워 재를 만들어 잿물에 닥 껍질을 넣어 4-5시간 정도 삶는다. 맑은 물에 여러 번 씻어서 잿물을 제거한 후 남아 있는 흑피나 티를 골라낸다.
그 다음에 돌판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가 부드럽게 분산 되도록 한 후 속칭 닥풀이라 부르는 황촉규 식물 뿌리 즙을 진윤제로 섞는다. 닥 풀을 혼합할 때 골고루 풀어지라고 휘졌어 약간 시간이 지난 후 대나무로 만든 세초발을 발틀에 얹어서 섬유를 고르게 떠낸다. 수분 제거는 돌이나 무거운 것을 올려 물기를 빼낸 후 건조시켜 한지가 생산된다.

한지 이름과 종류
백초지(白硾紙) 삼국시대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지(高麗紙) 송나라 때 우리한지를 수입하여 고려에서 온 종이라 고려지라고 하였다. 계림지(鷄林紙) 송나라 당시 신라에서 온 종이를 뜻하는 의미로 붙여 계림지 또는 고려지라 동시에 부르기도 하였다. 저화지(楮貨紙) 순 닥나무 껍질로 약간 두껍게 만들어 표(表), 전(箋), 자문(咨文), 책, 문서 등을 만들며 외국에 보내는 문서로도 활용. 유엽지(柳葉紙) 버드나무 잎을 닥나무 껍질과 섞어서 만든 종이. 마골지(麻骨紙) 삼대와 닥나무껍질을 섞어 만든 종이. 순왜지(純倭紙) 우리한지는 도침하기 전에는 털이 일어나기 때문에 외국 닥나무를 수입하여 만든 종이.
상화지(霜華紙) 조선시대 세종 때 전라도 순창 부근에서 만들었는데 윤이 나고 질긴 종이를 만들었다. 백면지(白綿紙) 상화지나 같은 시대 만든 종이인데 품질이 좋고 비단과 같은 흰 종이. (세종실록) 호정지(蒿精紙) 한말 함경북도에서 만들었는데 그쪽지방 많이 재배하는 귀리짚과 다른 섬유를 혼합하여 만든 종이. 고정지(藁精紙)볏짚 보리짚 귀리짚 등 섬유질로 만들어짐. (호정지나 비슷한 수법으로 만들어짐.) 곡지(穀紙) 닥 껍질과 갈대 섬유로 만들어짐. 모절지(麰節紙)남쪽에 많이 심는 보리짚과 닥 껍질을 약간 섞어 만들어짐. 상지(桑紙) 뽕나무 껍질 섬유를 주원료로 만들어짐.
장지(狀紙) 종이를 두껍게 만들어 도침하여 주로 궁중에서 많이 사용함. 생지(生紙) 종이를 만들 때 가공하지 아니하고 약간 꺼칠게 만들어짐. 도침백지(搗砧白紙) 표백제로 썩어 흰색으로 만들어 홍두께로 종이를 말아 다듬이질을 함. 예지(隷紙) 책 겉표지 능화판으로 다양한 문양을 찍어 만든 종이. 외장지(外狀紙) 두껍고 질기게 만들어 휘장용(揮帳用)이나 고급 포장지 등으로 사용. 단지(丹紙) 결명 주사로 색을 잎혀 적색종이를 만들어짐. 죽청지(竹淸紙) 대나무 속 껍질처럼 희고 얇아 붙어진 이름. 의이지(薏苡紙) 율무 줄기를 주원료로 만든 한지. 은면지(銀面紙) 은박을 올리거나 은빗 색으로 만든 한지.
위에서 언급한 이름처럼 우리 전통한지 이름이 너무 다양하고 재료 또한 다채롭게 만들어진 기록만 남아있고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었다는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전통한지 사용용도
책, 족보. 경전 등을 제작할 때. 글씨나 그림 그릴 때. 창살로 만들어진 문짝(문) 바를 때. 한지 등 만들기. 한지에 식물성 기름을 먹여 장판으로 사용. 한지에 색을 입혀 고급벽지(도배지) 사용.
한지 인형 만들기. 한지 옷 만들기. 한지 가구 만들기. 한지 부채만들 때 사용. 한지로 다양한 공예작품은 지승공예(紙繩工藝) 지장공예(紙裝工藝) 지호공예(紙戶工藝) 지색공예(紙色工藝) 지전공예(紙剪工藝) 지화공예(紙花工藝) 등이다.

동양 삼국(한국 중국 일본) 비교와 특징

전통 한지(韓紙)
우리한지의 주원료는 닥나무 껍질을 깎고 두드리고 삶아 풀어 목회(木灰)를 사용하며 80여 가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리한지는 섬유질 사이사이로 공기 통풍이 잘되고 비 오는 날은 습기를 흡수하고 건조해지면 평창 수축을 반복하며 숨을 쉬는 명품종이다.
중국 선지(宣紙)
중국 안휘성 경현(涇懸) 지방에서 주로 많이 생산되는 선지 주원료 볏짚 펄프섬유와 청단피 마피 등 재료를 섞어 만들어지는데 얇고 잘 찍혀지며 물에 젖으면 힘없이 쳐진다. 장점은 먹물을 잘 흡수하여 서예가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주로 많이 이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선지(畵宣紙) 또는 옥판선지(玉板宣紙)라 부른다.
일본 화지(和紙)
우리나라와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데 닥나무 껍질과 안피 삼지닥 등의 재료를 첨가하여 잿물과 함께 소석회(消石灰)로 삶고 씻고 도초회(稻草灰)로 또 끓이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들어지지만 종이 질은 약간 두꺼워 한지 보다 못하다.

19세기 기계식 초조기(抄造機) 등장
채륜이 이후 종이가 전파된 후 7세기경 중국인 포로 사마르칸드(samarkand)dp 의해 여러 국가로 전파 되었다. 12세기 이르러 무어(moor)인 의해 에스파냐에 도입하여 점차 유럽에도 확산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는 식물섬유 넝마 원료로 하는 수공적인 제지가 만들어졌다.
19세기 이르려서야 기계화가 시작되어 1789년 로베르(L.rodert) 연속식 초조기(抄造機)를 고안하고 1808년 푸르드리니어(H.fourdrinier) 형제가 대량 기계생산에 성공하였다. 또한 거의 동시에 디킨슨(D.dickinson)이 환망식초지기(丸網式抄紙機)를 발명하였다. 인쇄술의 발달은 제지기술 발달을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른 원료의 대량 생산이 1840년 켈러(F.G.keller)의 쇄목펄프 발명으로 1854년에는 소다펄프 1866년엔 아황산펄프 1884년 크래프트 펄프가 연이어 발명 되었다.
19세기 말 기계식 종이가 양산되고 서양과 유럽 종이가 우리나라 수입되면서 우리 전통 한지는 차츰 줄어들면서 쇠퇴하기 시작되었다. 기계로 만든 종이보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한지 원료공급 및 제작과정에서 인건비 금액 차등으로 점차 줄어들었다는 느낌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때 일본종이가 많이 수입 되었고 해방 후 양지 종류가 다양하게 들어와 대중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끝으로 한솔제지 종이 박물관 자료 협찬에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163권154책』
『역사학보』 이광린 계림지
『아세아연구』 강만길
『미술사학논총』 황수영 박사
『한지역사와 제지』 전 철
『조선시대 제지수공업 연구』 김삼기 석사논문
『전통한지 기술을 응용한 한지개발동향』(학술지) 박태영,김동훈,이근완,정용식.
『전통한지를 통한 미술교육효가방안』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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