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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보 선생 후손으로서

백암정(白巖亭) 복원을 고마워하며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19년 12월 25일
허원보 선생 후손으로서
백암정(白巖亭) 복원을 고마워하며

문학박사/시인 허만길
(전 교육부 국어과 편수관)
ⓒ 의령신문

▲ 백암정 창건자는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선생
나(허만길: 문학박사. 전 교육부 국어과 편수관)는 1480년경 백암정(白巖亭)을 창건한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 선생의 후손이다.
유학자이며 시인이며 교육자인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는 경남 고성에서 살다가 신혼살림을 의령현(의령군) 가례(嘉禮)에 꾸리고서, 백암(白巖. 흰바위)과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白巖’(백암))이라 첫 현판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는 혼인 시기가 빨랐다는 점과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여, 1480년 전후로 허원보가 가례로 이주하였으리라 추정하고, 백암정도 그때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했다.
허원보의 묘갈명(묘비문)은 처음에는 그의 손녀의 남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썼는데, 세월이 흘러 묘비에 금이 가고 글자가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조선 후기에 의금부 도사 척암(拓菴) 김도화(金都和: 1825-1912년)가 다시 묘갈명을 써서 묘비를 세웠다. 의령군 의령읍 무동(무전) 허원보의 묘역에 있다. 허원보의 재실(齋室) ‘고망재’(高望齎)와 가깝다. 김도화가 쓴 묘비문은 ‘김해허씨세보 권1’ 비명(碑銘) 모음(55-56쪽. 1936년 발행)에도 실려 있다. 이 책에 김도화가 ‘생원 예촌공 비명’(生員禮村公碑銘)이라는 제목으로 쓴 허원보의 묘갈명에는 가승(家乘. 직계 조상의 일을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원래 허원보의 묘갈명은 퇴도(退陶. 이황의 호의 하나) 이황(李滉)이 썼지만, 세월이 변하면서 묘비가 갈라져(碣泐) 글이 전하지 않는 까닭으로 자신이 다시 쓰게 된 배경을 말하고서, 허원보는 20살에 사마시(*김해허씨세보에는 26살에 사마시 합격 기록)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가례’(嘉禮)의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작은 집을 지어놓고 ‘白巖’(백암)이라 현판을 걸고, 낚시질로 스스로 즐기고, 시를 읊어 풍류로 삼으면서, 세상의 명예와 이익과 어수선함과 화려함을 멀리했다.”(嘗酷愛嘉禮山水規置小屋而扁之曰白巖漁釣爲自娛嘯詠爲風流世之聲利紛華皆窅如也)라고 했다.
‘김해허씨세보 권1’(3-4쪽. 1936년 발행)의 ‘허원보’(許元輔) 항목에 허원보는 “자는 몽득(夢得), 호는 예촌(禮村)이며, 성품이 온후하고 효와 우애에 힘썼다. 26살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거하였으며, 가례(嘉禮)의 백암(白巖. 흰바위)과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했다.”(字夢得 號禮村 景泰乙亥生 性本純厚躬行孝友 二十六中司馬 自固城移居宜寧 愛嘉禮白巖山水 規置一亭曰白巖)고 되어 있다. 백암정의 유래는 묘비에 실린 내용과 일치한다. 백암(白巖. 흰바위) 바위는 백암정 앞에 있으며, 그 유래는 ‘의령군지’(2003년)에도 나타나 있다. 허원보는 백암정에서 유명 정치인이며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좌랑(佐郞) 김영(金瑛) 등과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뒷날 허원보의 손녀의 남편 퇴계 이황(李滉)도 이 백암정에 올라 시를 읊었다.
▲ 허원보의 자녀와 인척 관계
허원보는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허수(許琇: 1478-539년)는 한양(서울)에서 선릉(宣陵: 조선 성종의 능) 참봉(參奉) 등의 벼슬을 지내고, 의령군 칠곡면 수부마을, 압수마을, 도산마을 지역과 연고를 맺었다. 그의 무덤은 칠곡면 압수마을 뒷산에 있고, 그의 재실 존저암(尊箸庵)은 도산마을 서쪽 산중턱에 있다. 허수는 퇴계 이황의 처백부가 된다. 허수의 장남 허안세(許安世)는 중훈대부(종3품) 예빈시(禮賓寺. ‘예빈사’라 읽지 않음) 참봉, 차남 허안정(許安鼎)은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 군자감은 군수품 기관)을 지냈다.
허원보의 둘째아들 진사 허찬(許瓚: 1481-1535년)은 창계 문경동의 맏사위이다. 문경동(1457-1521년)은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 편수관, 성균관 사성, 청풍 군수(종4품)를 지냈다. 허찬의 장남 허사렴(許士廉)은 퇴계의 처남으로서 퇴계의 요청에 따라 청량산(경북 봉화군) 절에서 함께 독서했다. 허찬의 차남 허윤렴(許允廉)은 역사책에서 처음이름 허사언(許士彦)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진주 목사(牧使. 정3품)를 지냈다. 허찬의 맏사위가 퇴계(退溪) 이황(李榥: 1501-1570년)이고, 퇴계는 허찬의 묘갈명을 지었다. 허사렴의 맏사위 오운(吳澐: 1540-1617년)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문과 급제 후 충주 목사, 광주 목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경남 백령(白嶺)에서 2만여 명의 의병을 모아 곽재우 장군과 함께 싸운 의병장령이다.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오르고 경주 부윤(종2품), 공조참의를 지냈다. 허사렴의 둘째사위 박녹(朴漉: 1542-1632년)은 경북 영주 사람으로서 임진왜란 때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었으며,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허원보의 셋째아들 허경(許瓊)은 참봉을 지냈으며, 딸 셋을 두었는데, 맏딸은 황해도 관찰사(감사)를 지낸 곽월(郭越: 1518-1586년. 곽재우 아버지)의 후처가 되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년)를 3살 때부터 길렀으며, 직접 낳은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褀)도 눈부신 의병 활동을 하였다. 곽월과 이황은 사촌동서 간이다. 허씨 부인은 곽월보다 11년쯤 뒤에 죽었다. 곽재우는 정유재란 때 1597년 8월 29일 창녕 화왕산성에서 계모 허씨가 죽자 상여를 모시고 산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후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치렀다.
허원보의 넷째아들 허연(許璉)과 다섯째아들 허관(許瓘)은 생원이었고, 여섯째아들 허환(許環)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직)이었다. 허관의 손자로서 무과에 급제한 허언심(許彦深: 1542-1603년)은 곽재우의 매부(누나 남편)이며 곽재우의 가족을 돌보면서 싸운 의병 장령이다.
허원보 맏딸의 남편 박양(朴良)은 선전(宣傳: 선정관청의 무관)을 지냈다. 둘째딸의 남편 박운(朴芸. 본관 밀양. 호 수성제修誠齊)은 호조정랑(정5품)을 지내고 이조참판(종2품)을 추증받은 졸당(拙堂) 박총(朴聰)의 증손자로서 삼가현 송지촌(현재 합천군 대병면)에서 살다가 처가가 있는 의령현 가례로 와서 수성(修誠)에서 살았으며. 병마우후(兵馬虞侯),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 종2품)를 지냈다. 그는 퇴계의 처고모부이며 퇴계와 가까이 지냈다.
▲ 백암정 복원의 고마움 인사
백암정은 세월과 비바람으로 넘어지고 파손되면, 김해 허(許)씨 문중과 가례 주민들이 고치기와 다시 짓기를 거듭했는데, 근래에는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크게 파손되어 넘어졌다. 나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의령신문》에 ‘백암정의 유래와 가치’를 비롯해 김해 허씨의 의령 정착 과정, 가례의 지명 형성 과정 등의 논문을 6차례 발표하면서 백암정의 복원을 주장했다. 의령문화원 발행 《의령문화》 제23호(2014년)과 《재경 의령군향우회60년사》(2015년)에 실은 나의 논문에서도 백암정 복원을 주장했다.
드디어 고맙게도 의령군에서 2019년 10월 백암정을 붕괴 전 모습으로 복원하고, 백암정 탐방로도 조성하는 공사를 계속하고 있다. 의령군에서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백암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2019년 6월 백암정을 군 소유로 등기했다.
그리고 2003년 파손된 백암정은 2014년 12월 의령신문사 박해헌 발행인과 재경 의령군향우회 강완석 회장이 의령박물관에서 백암정(白巖亭) 현판과 기문(記文) 현판을 찾아, 가례 지역 임인생(壬寅生) 24명이 동갑계를 만들어 1958년에 기와를 올리고 1959년에 중건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강완석 회장은 중학생 시절에 그의 아버지 강신의(姜信義) 님이 백암정 중건에 열정을 쏟던 일과 그가 아버지를 돕던 일을 기억하여 의령문화원 발행 《의령문화》 제24호(2015년)에 ‘백암정 복원 열정을 생각하며’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백암정 창건자인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선생의 후손인 나는 아버지 허찬도(許贊道)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1943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고 이듬해부터 의령군 칠곡면에서 자랐다. 백암정을 복원해 주신 의령군과 군민들께 큰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의령신문 기자 / urnews21@hanmail.net입력 : 2019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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